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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의미

날으는 햄버그 2008. 1. 22. 03:04
 

2007년  12월  12일  수요기도회

 

본    문 : 고후 1:3-11

제    목 : 고난의 의미

 

오늘 말씀의 제목은 고난의 의미입니다. 사람은 예기치 않던 어려움이나 고난들을 종종 겪곤 합니다. 그리고 고통이 심하면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러한 고난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인간에게 고난이나 고통을 허락하셨을까요? 물론 우리가 그 깊으신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왜 고난을 종종 허락하시는 지 그 중요한 이유 몇 가지를 알게 됩니다.

 

1.하나님만 의지하게 만드시기 원하심

 

8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한마디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절망적인 고난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9절에서는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 라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은 왜 그러한 고난이 자신에게 있게 되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답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9절 중반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즉 고난이 있게 된 것은 더 이상 인간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뜻입니다.

사실 편안해지고 일이 잘되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잘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배따시고 등 부르면 아니죠? 등 따시고 배부르면 은혜를 잊는다, 라는 유명한 말도 있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손대는 것마다 잘되고 하는 일마다 잘되면 우리는 우쭐대기 쉽고 금방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은근히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고 자신을 의지하기 일수 인 것이 여러분과 저의 본성입니다.

이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맘대로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충동(libido domiandi)이 있는데 이것은 곧 교만 혹은 오만함으로서 이것이 바로 사탄이 범했던 죄이고, 또한 아담 타락의 원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담의 죄 된 흔적들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인 우리들에게도 근본적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사람은 예외 없이 금방 교만해지기 쉬운 존재들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자기 집착의 방향으로 가기 쉬운 죄성이 여러분들에게도, 저에게도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죄성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죄성을 뽑아내기 위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도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노라고 고백합니다.

 

2.인간의  의지를  꺾기 위해서

 

특히 자기의지가 천성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 중에 한 명입니다.

사실 선천적으로 의지가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온순한 나귀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위험성이 약합니다. 물론 그 의지조차 단련되어야 되겠지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자기 앞마당에 당나귀가 아니라 힘센 말 한 마리를 매어 놓은 것과 똑같습니다. 이 힘센 말을 훈련시키거나 길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힘센 말이 그 발굽으로 집을 쳐버리던지 온통 식구들을 발로 차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여러 고난들을 통하여 그러한 인간 자아의 고집과 의지를 꺾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손에 잘 단련되고 훈련되면 그 말은 멋지게 아름답게 사용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난이나 역경은 그렇게 자기의지를 꺾는데 좋은 통로로 사용되지만 성공은 오히려 자신의 자아나 의지를 부추 키는 통로가 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외적인 성공과 신앙은 반비례할 때가 많고,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 외적인 성공을 거두어 스스로 교만하고 타락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을 떠나는 인생을 산다면 그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 교만에 빠진다든지 자기 집착적인 쾌락에 빠지는 것은 마치 쥐가 쾌락에 대한 자극을 추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신경외과 의사들이 그런 실험을 해보았는데 이 쥐의 뇌에도 행복과 쾌락을 관장하는 중추가 있답니다. 그래서 이 쥐의 중추에다가 전극봉을 삽입하고 쥐들이 직접 레버를 누르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어 주면 이 쥐들은 결국 어떻게 할까요? 계속해서 레버를 누르느라 정신이 없어서 나중에는 먹지도 않고 누르다가 다 굶어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세상 적인 쾌락의 실체입니다. 사람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컴퓨터 오락이 너무 재미있어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계속해서 합니다. 그 쾌락에 취하는 것입니다. 술 중독도 그렇고, 성 중독, 도박 중독, 마약 중독 등이 다 똑같습니다.

그 쥐처럼 쾌락의 자극이 계속되니까 정신없이 거기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폐인이 되거나 인생 다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쾌락과 안일함으로 치닫는 인생에게는 찬물을 끼얹든지 꼬집던지 하여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이상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고난을 그러한 찬물로 종종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교만한 자기애에 빠지기 쉽고, 쾌락과 안일이라는 자기 집착의 잠에 빠지는 경향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를 깨우시고 각성시키실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겸손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생명과 참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이 예화는 여러 번 들어보셨을 겁니다. 역사 연구가 아놀드 토인비가 즐겨하던 이야기, 싱싱한 청어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바다에서 잡힌 값비싼 청어들이 육지까지 오는데 늘 지쳐 죽는 경우가 많아서 제 값을 못 받았는데 어떤 청어 장수의 청어들만큼은 끝까지 아주 싱싱했더랍니다. 어떻게 된 건가?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청어들을 싣고 오는 그 수족관 안에 청어의 천적 되는 메기나 상어를 한두 마리 함께 넣어두면 그 청어들이 도망 치다보니까 청어는 다들 싱싱한 횟감처럼 펄펄 살아 있는 고기가 되었다는 그 이야기, 좀 청어들한테는 안됐지만 그래서 그 청어들의 가치는 수준 높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이 많으면 자기 절제를 잘 하게 됩니다. 고난이 많으면 깨어 있게 됩니다. 특히 고난을 신앙으로 잘 대처하면 그는 수준 높은 청어처럼 영적으로 각성된 깨어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가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힘들어도 새벽 기도회 나오고 철야도 하고, 연어와 같이 고난을 치고 올라가는 삶을 살면 그 영혼의 상태가 하나님 안에서 잘 연단되고 구비된 생명력 넘치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고난을 회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시면서 다가오는 고난들에 직면하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장 2절 말씀입니다. 고난을 기쁘게 여기고 고난에 동참할 수 있는 성숙한 단계까지 여러분과 제가 함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다질 수 있는 축복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서양 격언에도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 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역경과 고난의 돌이 없다면,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노래를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역경을 통해 신앙인들은 하나님 기뻐하시는 그 아름다운 감동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위해 처음부터 에서가 반대하지 않도록 만드실 수도 있었고, 요셉을 감옥에 갇히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으며 다니엘을 사자 굴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실 수 있었고 바울에게 환란과 고난이 닥치지 않도록 원천 봉쇄하시며 막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고난들이 하나님 안에서 때가 되매 일어났고 그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께 더욱더 가까이 나가게 되었으며 그들은 결국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아가는 단련된 신앙의 사람들, 빛나는 신앙의 용장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는 시편 119편 71절 말씀, 그리고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라는 오늘 본문 9절 말씀을 기억 하시면서 고난 가운데에서도 항상 감사하고 더욱더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더 성숙하게 기꺼이 주님을 위해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단련되고 훈련된 심령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삶들이 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