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1일 금요기도회 설교
2011년 3월 11일 금요기도회 설교
본 문 : 출15:22~27/찬송: 384장
제 목 : 나는 역경을 통해 강점을 찾는다.
하나님은 긍정적이십니다. 하나님은 긍정적이시기 때문에 어떤 일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배신하였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들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고통의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아픔의 생애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너무도 고통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가난하셨습니다. 무시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비참히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위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예수님은 시련 가운데에서도 승리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항상 찾아오는 손님이 있습니다. 싫은데도 찾아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바로 시련입니다. 사람들의 시련에 대한 반응은 다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역경에 부딪혔을 때 어떠한 태도로 그 문제를 대하십니까?
인생에는 기쁨과 축제가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가 바로 그랬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오,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라. 여호와는 용사시니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지어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미리암의 소고치는 박자를 따라 춤추며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해변에서 언제까지나 축제만 벌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일어나 구름기둥을 따라 나서야 합니다. 구름기둥은 홍해 해변가에서 떠나 수르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본문 22절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는 홍해가운데 물을 없게 만드시고 이스라엘백성들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똑같이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는데, 홍해의 해변가에서는 찬양했고, 수르광야에서는 원망했습니다. 삼일 전에는 물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삼일 전 물이 없는 홍해에서 구원을 경험했을 때 그들은 춤을 추었는데, 삼일동안의 역경을 참지 못하고 마라에서는 불평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이 없는 마라로 인도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옮기실 때, 단 한 번도 이스라엘백성들과 회의를 해서 진로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과 상의해서 불기둥 구름기둥의 나아갈 길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세상은 민주화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에 의한 복음화를 추구합니다. 민주화를 요구했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사울을 왕으로 선택해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의 민주화의 결과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말씀을 버렸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버렸습니다. 마라는 고통의 현장입니다. 마라는 쓴물이 있는 장소입니다. 마라는 목마름이 있는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족이 원치 않아도 때로 우리가정을 마라로 이끄십니다. 마라의 쓴물을 마시게 합니다. 마라의 고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난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성장'시킵니다.
25절b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학생들은 고등학교,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시험을 치고, 학교를 다니면서 계속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시험을 치는 첫 번째 이유는 통과시키기 위함입니다. 시험의 목적은 탈락이 아니라 합격입니다. 시험을 치는 두 번째 이유는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함입니다. 시험을 통해서 열등생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서 실력을 키우게 됩니다. 본문 25절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시험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시험하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시험에 통과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그들을 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쓴물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시험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 너희는 기쁨의 축제를 벌였다. 나에게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불렀지. 그런데 너희는 사흘 동안 사막을 횡단하면서 오아시스를 만나지 못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苦痛하는 너희 앞에 쓴물이 있다. 이제 어찌할 것이냐?” 24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하매”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시험문제에 불평과 원망의 답안지를 제출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는 어떤 고통의 시험이 있습니까? 어떤 마라의 쓴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가는 길목에 마라의 쓴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마라의 쓴물, 즉 하나님의 시험문제는 여러분을 성장시키기 위한 테스트입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바꾸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키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강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거친 광야를 다스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새들이 알을 낳았습니다. 어떤 새는 절벽 위에 알을 낳습니다. 그 절벽은 直壁입니다. 떨어지면 죽습니다.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 닥칩니다. 여름에는 뜨거운 폭풍, 겨울에는 차가운 한파가 불어칩니다. 새가 알에서 깨었습니다. 깨어나자, 마자 맞는 것은 무서운 폭풍이었습니다. 폭풍에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서 버팁니다. 뜨거운 바람, 차가운 바람 쉴 새 없이 몰아칩니다. 어느 순간에는 위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집니다. 그야 말로 하루, 하루가 공포입니다. 그러나 이 새는 그 무서운 상황을 견디어 내며 점점 자랍니다. 그리고 어느 때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시련입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려야 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한참을 망설인 새는 드디어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린 순간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바람을 타고 높이, 높이 날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넓은 창공의 모두 자기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 새가 독수리입니다. 반면에 어떤 새가 알을 낳았습니다. 요람에 알을 낳았습니다. 아주 포근한 요람입니다. 떨어질 곳이 없습니다. 바람도 없습니다. 모든 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됩니다. 일 년 내내 온도가 일정합니다. 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 주사도 놓아줍니다. 새가 알에서 깨어나 점점 자랍니다. 먹을 것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아래만 쳐다보면 먹을 것이 놓여있습니다. 물도 언제나 풍족합니다. 몇 個月만에 다 자랐습니다. 닭이 되었습니다. 독수리와 닭의 차이는 시련의 차이입니다. 시련이 없이 자란 닭은 땅만 바라보고 다니지만 시련가운데 우뚝 솟은 독수리는 새들의 왕이, 또 성경에서처럼 하나님의 새가 됩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독수리로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시련을 통해서 독수리처럼 날기를 원하십니다.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때로 여러분! 싫어도 절벽위에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매서운 바람을 맞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독수리처럼 왕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독수리는 여러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높이 납니다. 다른 새들이 따라올 수 없는 높은 하늘을 납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큰 능력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가장 높이 나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를 바꾸어나가십니다. 독수리는 높이 날기 위해서 스스로 고통과 역경과 시련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야 높이 날 수 있습니다. 독수리처럼 우리 사랑의교회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탁월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능력이 탁월하고, 인격적인 능력이 탁월하고, 사역이 탁월하고, 사명이 탁월하고, 구조가 탁월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 멀리 봅니다. 높은 절벽에서 멀리 바라봅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비전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독수리처럼 멀리 보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닭처럼 바로 아래에 있는 모이만 쪼아대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현실에 급급하고, 지금 자리에 급급하고, 현 상태를 유지하게 급급한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큰 꿈을 가지고 먼 미래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요셉 같은, 다니엘 같은 사명의 사람, 꿈의 사람, 목적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유유히 납니다. 닭이 나는 것 보십시오. 닭은 날지도 제대로 못하지만 파드득하면서 뛰어가지만 독수리는 바람을 타고 유유히 납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긍정적 인생, 넉넉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원하십니다. 폭넓은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을 받아주며, 용서하며, 섬기며, 이해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시련도 받아주고, 어떤 어려운 환경도 받아주고, 도전하고, 용기를 갖고 미래를 향하여 넉넉하게 나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너무나 큰 시련이라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에 담대하십시오. 예수님은 마6:31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의 염려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염려와 두려움을 다 맡아주실 만큼 위대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41:10절에서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그 두려움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여러분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두려움을 해결하여 주십니다! 벧전5:7절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고난은 성장의 디딤돌입니다. 시험의 목적은 탈락이 아니라 통과입니다. 시험은 성장을 위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장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란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를 말합니다. 성장은 미숙한 시점에서 성숙한 시점사이의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 시간이 하나님보시기에 1초 같지만 우리에게는 100년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고통의 시험은 성장을 위한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성품'을 고치십니다.
26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를 치유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성품을 고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질병 때문에 고통하십니까? 육체의 질병 때문입니까? 마음의 질병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고치시는 의사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신적인 질병도 치유하시고, 우리의 비뚤어진 성품도 바르게 고치시는 카운슬러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와 마음뿐 아니라 환경까지도 고쳐주십니다.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25절>은 이렇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통하여 쓴물을 단물로 고치셨습니다. 왜 나무를 던지게 하셨을까요? 벧전2:24절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모세가 던졌던 나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의 쓴물로 苦痛하는 마라 같은 세상에 던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치료하는 여호와 라파(Jehovah-Rapha)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육체를 치료하십니다. 예수님은 미숙하고 왜곡된 우리의 성품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중독에 사로잡힌 영혼을 치유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붙잡고 매어 달리십시오. 길은 오직 그곳에만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성공'으로 이끄십니다.
27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 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마라의 끝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엘림입니다. 엘림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칠십 그루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엘림은 오아시스(Oasis)입니다. 마라에서 엘림까지는 불과 반나절거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마라에서 불평과 원망의 답안지를 제출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마라만 바라보았지, 반나절 거리에 있는 엘림을 보지 못한 까닭입니다. 만약, 그들이 반나절 거리에 엘림이 있음을 볼 수 만 있었다면 그들은 원망대신 찬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엘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엘림은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조엘 오스틴이 멋진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쉼터는 믿음이 있는 장소이다.” 그렇습니다. 비록 목마름과 쓴물의 마라에 거할지라도 믿음만 있다면 그곳은 쉼터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독수리처럼 날개 쳐 올라가고 싶다면 닭의 삶을 버려야 합니다. 마라의 쓴물이 여러분 앞을 가로막고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투덜거리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닭의 소리가 들리면 독수리처럼 믿음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기 원합니다. 마라의 쓴물 앞에서 투덜거리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은 결코 엘림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사람만이 마라 너머에 있는 엘림을 볼 수 있습니다. 마라 너머에 있는 엘림을 보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합니까?
첫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련이 올 때 세상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세상을 바라볼수록 절망만이 밀려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습니다. 절망만 줍니다. 시련 가운데에서 독수리가 되는 비결은 딱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앙망한다는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도움을 청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원을 둔다는 것입니다. 시련이 밀려오면 소원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하나님을 찾아가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러자 한밤중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감옥 문이 열리고 바울과 실라의 쇠고랑이 풀어졌습니다.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했던 힘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이성의 힘도 아닙니다. 경험의 힘도 아닙니다. 이 힘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힘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셨던 힘입니다. 오병이어를 일으키셨던 힘입니다. 파도를 잔잔케 하셨던 힘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너라”명령하셨습니다. 파도를 향하여 “파도야 잔잔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일곱 귀신 들린 여인에게 “귀신아 그 여인에게서 떠나라가” 명령하셨습니다. 모두가 순종하였습니다. 시련은 고통의 시간입니다. 동시에 능력의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통을 향하여 나가십시오. 그때 하나님의 지혜를 얻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을 얻습니다.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능력을 얻습니다. 모든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얻습니다.
둘째 기다려야합니다. 시련의 때는 조용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시련을 하나님의 방법에 맡기는 때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하실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합니다. 모세가 홍해 앞에서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를 보았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군대입니다. 앞에는 출렁이는 홍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우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심히 두려워합니다. 모세를 향하여 원망합니다. 우리를 이곳에서 죽이려고 끌고 나왔느냐 소리 소리를 질러댑니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출14:13-14) 이것이 역경을 만난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까? 하나님께 찬미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렸습니까? 그러면 안절부절 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지, 어떻게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시는지 가만히 바라보십시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시37:7)
셋째 앞을 향하여 계속 날아 가야합니다. 시련이 밀려왔을 때 하던 일을 포기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바람이 분다고 독수리가 절벽에 기대어 쉬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바람이 불면 바람을 타고 더욱 더 높이 납니다. 사40:31에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역경이 밀려왔을 때 계속 달음질해야 피곤치 않고 걸어가야 곤비치 않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더욱 더 피곤하고 곤합니다. 역경의 파도가 밀려올 때 이렇게 스스로 다짐하십시오. “내 안에는 하나님의 힘이 가득해.”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셔” “나는 극복할 수 있어”·“난 계속해서 가야돼” “난 아직도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아” “난 주님이 명하신 사명적인 삶을 살아야 해” 시련이 오더라도 계속해서 가십시오. 사명을 불태우고, 믿음을 불태우고, 꿈을 불태우고, 이것을 위해서 변화하시고, 도전하시고, 새롭게 되십시오. 기도하시고, 믿음의 큰 역사를 바라보십시오. 시련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시련은 복입니다. 하나님은 시련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독수리로 만드시기 원하십니다. 독수리가 되십시오. 가장 높이 나십시오. 가장 탁월한 사람이 되십시오. 가장 멀리 보십시오. 가장 큰 사명, 꿈을 가지십시오. 가장 넉넉한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받아서 변화하고 넉넉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 앞에 고난과 역경이 다가온다면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경의 쓴물은 단물을 주시기 위함이요, 고난의 마라는 엘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시험에서 날마다 합격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