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17일 금요기도회 설교
2014년 10월 17일 금요기도회 설교
본 문 : 단 3: 28-30
제 목 : 세 친구처럼
오늘은 다니엘 3장 28절에서 30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세 친구처럼”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에 따라 본문에 등장하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믿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을 목적하는 세 친구 (28-)
하나님을 목적으로 생각하는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수단으로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질은 하늘과 땅만큼 달라집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온갖 축복이 목적이요, 하나님은 나에게 그 축복을 주시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잘 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그 신앙은 전혀 써먹을 데가 없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최고로 출세하는 자리요, 부귀와 영화까지 따르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밤중에 공회를 소집하여 나가보았더니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하는 자리였습니다. 그전에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먼저 결정했습니다(요9:22). 출교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상당히 무서운 처벌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은 72명으로 바리새파 절반, 사두개파에서 절반이었습니다. 만약에 출교 처분을 당하면 절대 다른 파에서 받아 주지 않고 의원직과 모든 것을 박탈당합니다. 사정이 비참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때 누가 예수 편에 서서 저들의 결의에 반대하고 나서겠습니까? 그런데 공회에서 전부 예수를 죽이자고 결정할 때 유일하게 아리마대 요셉은 ‘아니요’하면서 예수 편을 들었습니다. 예수 없는 부귀영화 권세는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찬102장의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가사처럼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오직 예수가 목적이기에 사나 죽으나 예수, 세상의 것을 다 빼앗겨도 오직 예수 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를 목적으로 한 신앙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8절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60규빗이 되는 우상을 세웠습니다. 1규빗이 45Cm입니다. 60규빗이면 27m입니다. 팔공산 통일대불보다 더 큰 우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관원들과 백성들에게 나와서 절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괘씸하겠습니까? 그래서 풀무 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해 놓고 절을 하라고 협박하였습니다. 절을 하지 않으면 내 손에서 또 저 풀무불에서 누가 너희를 구원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세 친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만약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구해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절대로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래서 세 친구를 결박하여 풀무 불에 던질 때 오히려 던져 넣던 사람들이 타 죽었습니다. 그 후에 보니 세 사람을 결박해 놓았는데 결박되지 않은 네 사람이 풀무불 가운데서 돌아다녔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사람은 사람인데 신의 아들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 나타난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당하는 성도들을 구경만 하시지 않습니다. 그 현장에 함께하십니다. 결박도 다 풀렸습니다. 빨리 나오라고 명합니다. 옷 하나도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몸에 단내도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기 목숨을 내 걸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철저하게 예배하는 세 친구를 하나님은 구원하셨습니다. 이런 기적 같은 구원과 축복이 그냥 놀고먹다가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인들에게 나타난 기적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보여주는 세 친구 (29-)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에 기도하러 성전을 찾았습니다. 성전 미문에 구걸하는 앉은뱅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거지입니다. 들어오며 나가는 사람에게 돈만 요구합니다. 몇 발자국만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예배당이건만 그 곳에는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좋은 조건입니까? 그럼에도 기도는 내 할 바 아니고 예수도 나 몰라라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아니합니다. 돈만 있으면 됩니다. 한 끼, 한 끼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내가 너에게 줄 돈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하면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발과 발목에 힘이 오르고 그 때서야 성전으로 뛰어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윈형제의 간증集 「하늘에 속한 사람」에 보면 요즈음에는 이 고백의 내용이 바뀝니다. “은과 금은 내게 있지만 예수의 이름은 없다”라고. 북한을 탈출한 어느 북한지하교회의 지도자 한분이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남북이 통일되면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북한에 교회를 건축하겠다고 돈 자랑하기 바쁜데 북한의 지하교회 지도자들은 성도들은 남한에 선교하겠다고. 예수를 증거 하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누구를 보여 주었습니까? 하나님을 보여 주고, 예수를 보여 주었습니다. 즉 너도 그 예수를 만나보고 체험하라는 뜻입니다. 그 예수의 능력, 그 예수의 축복, 그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났고 체험했습니다. 그 결과 기뻐 뛰며 찬송을 했습니다. 예수를 보여주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9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 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라 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온 천하에 조서를 내렸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보여주신 그 하나님께 대해서 설만히 말하거든 몸을 쪼개 버리고 그 집에 불을 놓아서 거름 터를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저런 지경에서 구원할 다른 신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이웃에게 또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여 주고 하나님을 보여 주는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 나중 형편이 더 좋은 세 친구 (30-)
예수 믿고 자꾸 형편이 나빠져서 완전히 망하고 남의 신세를 지고 폐를 끼치면 되겠습니까? 예수 믿고 점점 형편이 좋아져야 합니다.
삼하3:1절을 보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고 합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온갖 것을 다 갖추었으나 다윗은 가난하고 비천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울의 집은 점점 기울어지더니 나중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전쟁에서 그 집안이 씨가 말라버립니다. 그와 반대로 다윗의 처음 형편은 말이 아니었으나 나중에는 왕통을 이룹니다. 나중 형편이 얼마나 좋아졌습니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울은 잘 될수록 하나님을 멀리하였으나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항상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나중이 좋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0절을 보면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세 사람을 통하여 풀무 불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본 느부갓네살 왕은 바벨론 도에서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높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 친구의 잘 된 것만 생각하고 그 자리만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네들이 어떻게 믿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도 세 친구처럼 믿으면 나중 형편이 더 좋은 성도가 될 줄로 확신합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기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을 가차 없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사람의 믿음은 쓸데가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보여주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세 친구는 풀무불 속에서 느부갓네살 왕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었고 느부갓네살 왕은 전국에 반포하는 신앙 고백적인 조서를 내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왜 이렇게 달라졌습니까? 세 친구가 하나님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나중 형편이 더 좋은 신앙인 이었습니다.
잘 믿고 또 바로 믿어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믿으면 우리도 점점 형편이 좋아진다는 것이 본문이 가르쳐 주는 축복인줄로 명심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감사하는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기도하는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찬양하는 그리 아니 하실 찌라도 순종하는 그래서 나중 형편이 상상을 초월하도록 잘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