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3월 15일 주일 오전 설교
2015년 03월 15일 주일 오전 설교
본문 / 요18:33-40
제목 / 진리가 무엇입니까?
소련에서 추방되어 미국에 망명한 솔제니친은 추방되기 직전 재판 석상에서 인간성을 부정하는 소련은 반드시 망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그는 "공산주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은 "그러면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마치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모습 같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의 죄를 찾아내기 위해서 유대 사람들의 왕이냐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인 것은 맞지만, 그 나라는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오셨고,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그의 말씀을 듣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로 판단하였지만, 유대인들은 강력하게 사형을 요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그 나라의 목적과 통치 원리는 세상의 나라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롬14:17). 그 백성들은 이기심과 경쟁심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깁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야 할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이에 빌라도도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그러나 빌라도는 주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혼자 예수님의 무죄를 결정합니다. 결과는 달라졌지만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가 무엇이냐 물었으면 주님의 대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한 결과는 자신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진리는 무엇입니까?
1. 진리는 다수의 주장이 아닙니다.(40절)
로마 통치자들은 유대인들의 큰 명절인 유월절마다 유대인들이 선택하는 죄수 한 명을 석방해 줌으로 그들을 회유하곤 해왔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처리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총독 빌라도 역시 유월절을 맞이해서 이 관례를 적용시켰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월절 사면 후보로 선정된 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바라바’였습니다. 그런데 전승에 의하면 바라바의 이름이 예수였다고 합니다. ‘예수 바라바’ 그리고 성경에 강도라고 기록된 이 사람은 열심당원으로 추정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메시아였고 예수 바라바는 무장 폭력으로 세상을 타도하려는 유대 열심당의 지도자였습니다. 예수의 무죄를 확신한 빌라도는 유대 군중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을 뒤엎고 유대 군중은 예수 그리스도 대신 예수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눅23:18절입니다. “바라바를 내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세상적인 욕망을 충족시켜 주려는 자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이 시대 우리들 앞에도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과 예수 바라바의 길입니다. 하나는 사랑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을 세우는 메시아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칼과 폭력으로 일시적인 세상 왕국을 세우는 자기 욕망의 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를 향한 빌라도의 질문은 아주 신랄합니다. “너희는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예수 바라바냐 아니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마27:17)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정녕 누구를 선택할 것입니까?
본문에서 보면 군중들은 자기들의 이권 때문에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들도 벳세다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을 때에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자고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생각에 주님보다는 바라바가 더 실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이익 때문에 주님을 죽이도록 하자는 가야바의 의중대로 그리고 제사장들의 선동대로 주님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요11:49) 성경은 우리에게 언제나 선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신30:19절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 진리는 불의에서의 도피가 아닙니다.(38절)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여기서 빌라도는 심문자이지만 오히려 피의자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인가 묻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증거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예수가 진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육신하신 진리 자체와 대화하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빌라도는 그 앞에 진리 자체가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irony)입니다. 이에 대하여 복음서 저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9-10).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복음서 저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비록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를 고발했다 하더라도 총독 빌라도는 이것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이므로 이 일에서 손을 떼기를 원했고 예수를 석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변수가 일어났습니다. 여태까지 예수를 열광적으로 따랐던 군중들의 변심입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강하게 빌라도를 압박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 친 것입니다.
누가는 이 부분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일제히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눅 23:18-23).
요한은 군중들이 만일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준다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 반역하는 것이라는 위협함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주장하는 부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19:12).
총독 빌라도가 그처럼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으나 예수를 구출했어야 할 군중들은 여태까지와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고 협박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희생양이 됩니다. 총독 빌라도는 군중들의 지지에만 관심을 가지지 진리와 정의의 실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양심에 따라서 재판을 하려고 애를 썼으나 결국 군중들의 요구에 굴복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원죄에 근거하고 있는 대중영합주의(populism)입니다. 여기에 오늘날에도 만연되고 있는 대중영합주의의 실상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가 알 수 있습니다. 군중들에게는 자기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갑니다. 열광하다가 순식간에 변하여 냉대하고 멸시합니다. 많은 사람이 간다고 해서 그 길이 바른 길은 아닙니다.
예수는 이미 산상설교에서 좁은 길로 가라고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넓은 길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로서 사이비나 위선자들이 가는 길이요, 세상의 사람들이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필경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에 반하여 진리의 길은 다수의 길이 아니라 소수의 길이며,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며, 영광의 길이 아니라 수욕의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인 것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진리의 길이 외형적으로 화사한 길이 아니라 어렵고 가시밭의 길일지라도 피하지 않고 그리로 사람들을 인도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써 바로 이 진리의 길, 생명으로 가는 길을 우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의 역사적 사실에서 진리에 저항하는 종교와 정치의 두 가지 역설을 보게 됩니다.
첫째, 율법 종교가 율법 완성자를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예수님은 태초의 말씀이요, 참 빛이시요, 생명이시며,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그런데 유대사회의 제도화된 종교는 이 예수를 증오하고 고발하고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유대교는 본래는 이 생명을 증거하기 위하여 생긴 것이나 제도 안에 정착함에 따라서 그 자신의 본질을 변질시킵니다. 그리하여 생명 자체보다는 자기 자신의 존속을 위하여 존재하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도화된 종교의 두 유형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입니다.
바리새파는 율법 종교의 유형이며, 사두개파는 인본화된 종교의 유형입니다.
둘 다 자기의 존속과 보존을 위하여만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영원한 통치자로부터 그 권력을 위임받은 세속의 권력이 영원한 통치자를 심문하고 판결하고 사형에 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세속의 권력은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자기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권력 자체에 위해를 가하는 자들을 처단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진리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리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습니다. “내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왔다”는 예수님의 대답에 대하여 빌라도는 진리의 의미에 대하여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인 줄은 알았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요구에 영합한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적 예수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복음을 제도종교화하는 위험성과 세속적으로 권력화하는 위험성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제도화된 기독교, 로마천주교, 제도화된 개신교 교권주의는 자기 권익을 지키는데 급급한 진리의 걸림돌입니다. 그리고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이나 자유주의 기독교는 진리를 세속화하는데 앞장서는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들은 자기들의 집단을 보존하고자하는 데 몰두합니다.
마태복음에는 빌라도의 태도를 보다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죄인 줄 알았습니다. 아내의 경고도 있었습니다. 너무 찜찜합니다. 심지어 손까지 씻으면서 책임을 회피 하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신앙고백을 할 때에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회피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면 자신이 깨끗하다고 스스로 위안이 될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불의와 함께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진리는 불의를 막는 용기입니다.
3. 주님이 진리며 주를 따르는 것이 진리입니다.(37절)
진리에 속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요8:32-36 사이를 보면 예수님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에 속한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진리는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즉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모든 것들이 바로 진리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것처럼 왕으로 오셨지만 그 왕은 세상적인으로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 사랑의 왕, 치료하시는 왕, 무엇이 올바른 길인가를 알려 주시는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왕을 따르는 것이 바로 진리를 따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주님은 자신이 진리라고 선언했으며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후에 주님을 장례하러 왔던 아리마데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요19:38,39)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유언을 들었던 요한처럼 진리를 따르는 자 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시므로 예수님의 백성은 진리를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진리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 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안에 진리가 있습니까?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에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1-32)고 하셨습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법을 다 지키는 사람이 됩니다. 성도여러분 안에 진리의 왕이 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심으로 모든 것으로부터 당당한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원수,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