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2016년 01월31일 주일오전설교

날으는 햄버그 2016. 2. 8. 09:18

20160131일 주일오전설교

 

본문 : 마가복음 8:34-9:1

제목 : 제자의 도: 십자가와 영광

 

할렐루야! 성도여러분 세상에는 명품이 있습니다. 그리고 명품은 비쌉니다. 명품을 갖고는 싶은데 돈이 없으니 짝퉁이 나왔습니다. 싼값에 사서 명품 흉내라도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술이 발달하니 가짜가 더 진짜 같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짝퉁을 진짜로 착각하여 많은 돈을 주고 사기도 합니다. 영의 세계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니 사탄이 있고, 그리스도가 계시니 적그리스도가 있고, 성령이 계시니 악령이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대책 없이 속게 마련입니다.

구약을 보면 내가 여호와 너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45:3; 20:20)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옛날에도 가짜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개구리, 파리, 메뚜기, 태양 등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는 그 열 가지에 재앙을 내림으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우상 선지자들과 대결하면서 여호와가 참 신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 당연히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제자입니까? 혹시 짝퉁은 아닙니까? 물론 최종 판단은 주님이 하시지만 수시로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됩니다.

마가복음을 크게 둘로 나눌 때 오늘의 본문이 분기점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날 때가 다가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하여 입술로만 고백을 한다고 저절로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본문은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제자인지 점검해보기 원합니다. 제자들은 삼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으면서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하였기에 예수님은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8:17) 하시며 답답해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한 번도 직접 밝히신 적은 없습니다. 그들 스스로 깨닫게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는데 제자들은 당신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아보고자 하십니다. 지난 주 설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평소에 듣던 대로 대답합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라,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 합니다. 그나마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만 보고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이제 주님의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지난 700년간 예언되어 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기다려오던 메시아,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자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당신에 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비로소 가르치십니다.

 

1. 수난을 예고하십니다(8:31)

 

시험칠 때 연필 굴려본 적이 있습니까? 글자 있는 데가 1, 그 다음에 2번 등등. 운이 좋으면 맞을 때도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이렇게 겐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맞춘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귀한 고백을 하기는 했으나 아직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비로소 가르치시니라 하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어떤 메시아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하리라.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은 53:5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13:7-9은 선한 목자가 수난을 당하고 양떼들 역시 흩어져 환난을 당하지만 그 연단을 통하여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스가랴가 언급한 두들겨 맞은 목자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14:27)로 나타납니다. 또한 6:1-2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치시고 사흘 만에 살리시고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목자로서, 또 이스라엘로서 죽으시고 또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운명 전체를 스스로 짊어지셨고, 그들에게 임할 종말의 심판을 대신 지시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사상 속에 깊이 흐르는 메시아관입니다.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반드시 감당해야 할 것들입니다. 주목할 사실은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이 대적들의 승리가 아닌 하나님의 뜻의 성취로 말한다는 점입니다. 죽음은 부활의 서곡이자, 영광의 수단이며,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고 소망을 가져오며, 따라서 슬픔의 대상이 아니라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2. 제자들이 오해합니다(8:32-33)

 

그런데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의 정의를 이룬다는 메시아관을 가졌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연약하고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행동은 그런 생각을 반영합니다. 성미 급한 베드로가 한 마디 합니다. 개역개정판에는 붙들고 항변하다로 점잖게 번역되어 있으나 헬라 원어는 꾸짖다는 뜻을 가집니다. 16:22입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강력하게 제지합니다. 얼핏 들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하여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해서 말합니다. 선생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부터는 예수님 때문에 한 자리 하고 싶다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지긋지긋하다는 겁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시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가 졸지에 사탄이라고 불립니다.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지혜로 답변했을 때는 귀한 고백을 하였으나 인간적인 생각이 앞섰을 때 예수님을 실망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이 앞설 때 비록 예수님의 제자라 할지라도 사단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앙의 관록이나 직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지 사탄의 함정에 빠질 수 있기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태도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결과라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신랄한 꾸짖음은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인간적인 본능이 제자도와는 결코 맞지 않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자신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시는 주님을 분명히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당하게 될 고난과 수치보다 그로 인해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과 구원을 얻게 될 영혼들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3. 제자도를 가르쳐주십니다(8:34-9:1)

 

예수님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무리들을 당신 곁으로 불러 주님을 따르는 도를 가르치십니다. 이제 제자들은 메시아뿐 아니라 그들 자신에 대해서도 인간적인 생각과 기대를 바꿔야 합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영생과 권능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의 죽음의 길에 동참함으로써만 주어집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1)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도의 핵심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은 자존감을 버리고 무조건 자기를 낮추라는 말이 아닙니다. 금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자기의 욕구를 무조건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란 자기중심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전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의 만족만을 위하여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함이란 바울은 인간의 정욕과 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내어버리는 것(5:24).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손해요 자신을 잃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볼 때 진정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참여함, 즉 철저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제자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14:6을 보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마무리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져야 할 십자가는 다릅니다. 사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주님의 칭찬은 같습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과거(aorist)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순간 당장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기의 권리를 유보하고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표현도 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당장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을 각오하고 지금 당장 주님을 따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까? 나를 따르라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계속해서 예수님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 뜻대로 계속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3) 잃음으로 얻는 사실을 알고 따라가야 합니다.

제자의 삶은 순종의 삶이요, 희생의 삶이요, 헌신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5-36).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을 어리석은 행위로 보고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한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 얻을지 몰라도 주님의 제자는 될 수 없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한 삶을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것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께 우선순위를 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으며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신 예수를 본받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매순간의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다는 것은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그를 위하여 살 때 예수님도 우리를 시인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예수님은 12:24에서 자신이 당할 수난을 밀알로 비유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기에 십자가에서 기꺼이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우리가 먼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악 된 성품이나 습관들을 다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비우면 비울수록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채워집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가 주님을 부인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마지막 날 주님께서 심판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에 우리를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 때문에 가족이나 이웃으로부터 멸시나 모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 면에서 손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렵더라도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주님은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 땅에서 한 수고를 인하여 상급을 주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잃는 것이 도리어 자기를 얻는 삶이요, 제자의 삶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역설이요 신앙의 신비입니다. 제자의 삶은 특별하게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주님과 하나 되어 자기의 옛사람을 따라 살지 않고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드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의 목회비전이 무엇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려면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아무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저의 간절한 소원이자 유일한 소원은 모든 교우들이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No cross, no life. 십자가 없는 생명은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원합니까? 자신을 부인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는 제자들이 우리 사랑의교회에 많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인하여 주님의 칭찬받는 교회요, 소문이 퍼지는 교회요, 부흥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성도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합시다.